2009년 8월 2일 일요일

기업이 주주에게 꽃이 되는 때

학창시절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내게 큰 감동을 주곤 했었다. 사랑을 말하진 않지만, 이 시만큼 사랑의 절절함을 절제된 시어와 풍부한 이미지 속에 담아 표현하고 있는 시가 또 있을까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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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ipcp.edunet4u.net


최근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시를 다시 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이 시를 관류하는 서정 속에서 나는 사회책임투자 중 '관여전략((Engagement)'의 일단을 만났다.

관여전략이란 주주가 기업의 문제에 대해 개선책을 제시하며 기업과 대화하는 투자전략을 말한다. 이 기법은 전통적인 수동적 투자방법 에 익숙해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기업에 대해 반대만 일삼는 이상한 투자방법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 나 내용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음미할 만 대목들이 참 많다.

우선 시간을 거슬러, 회사법(Company Act)이 만들어졌던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안 시대로 가보자. 최악의 상황에도 투자 한 돈만 날리면 되는 대신(유한책임), 투자한 사람들에게 임의적으로 매매할 수 있는 주권을 교부했던(소유권 유통) '주식회사 제도 '의 등장은 그 당시 가히 혁명적 사건이었다.

금융시장 발달에 따라 기업은 주권 발행을 통해 거대 자본 조달이 용이해졌다. 투자자들은 유한책임으로 이 기업, 저 기업의 주인이 되어 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금융시장의 규모와 참여자가 증가하고, 기업 경영이 날로 전문화되면서 회사법 상의 주인인 주주들은 흩어지고, 그들의 얼굴은 점점 무대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최근 수십년 동안 매매 시스템의 고도화와 매매의 용이성으로 이러한 현상은 심화했다. 따라서 기업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됐다. 주 인이 없는 그 지점에서 경영진은 그들만의 잔칫상에 몰입하게 된다. 여기서 발생한 대표적 사건들이 바로 엔론(Enron) 추문이 며 우리의 경우에는 SK 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이다.

관여전략을 채용하는 대다수의 사회책임투자자들은 시비거리만 찾는 트러블 메이커들이 아니다. 그들의 전략은 기업의 법적 주인들로서 그 들의 잃어 버린 주권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시장 기능의 중심축을 기업과 지배주주로부터 투자자의 방향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견제와 균 형을 담보하려는 노력이다. 아울러 기업과 함께 공동의 문제를 함께 풀어 보자는 대화의 몸짓이다.

또한 그러한 시도들은 자신들이 투자한 자금을 정확히 관리하려는 의지의 선언이다. 혹, 남의 자금을 관리하는 수탁자(Trustee) 라면 수익자(Beneficiary)에 대한 성실한 의무(Fiduciary Duty)를 다하려는 것이다. 내 돈이라면 그렇게 수동적 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럴 수 없다"라고 외치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주주가 침묵할 때 일견 시장은 고요할 수 있다. 주주가 기업에게 다가가지 않을 때 시장은 평온한 듯 보인다. 그러나 주주와 기업 이 만나는 접점이 단지 주식을 사고 파는 매매 시스템 그리고 유가증권 잔고내역에만 한정된다면 시장은 바닥부터 부패할 가능성 이 꽤 높다.

그리고 그 사이 주주권은 감옥에 갇히는 격이 되고 만다. 여러 가지 유형의 철창들이 존재하는 감옥에 말이다. 개발경제의 부산물 인 친기업적 정서와 제도, 지배주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중무장한 임원들, 기관투자자들의 수동적 투자와 단기 투자, 이사책무 의 ABCD도 모르는 이사회, 시장을 단순히 자본 조달창구로만 알 뿐 시장에 대한 의무에는 소홀한 경영진, 이 모든 기제에 줏 대 없이 들락거리는 대다수 정치인, 관료와 언론들, 이 모두가 주주권을 감금하는 보이지 않는 철창들이다.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주주권의 철창 속에서 주주가 기업에게 다가가기 전 그는 하나의 투자자(투기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철창이 걷히고 기업에게 다 가갈 때 투자자(투기꾼)는 비로소 기업의 주인이 된다. 마치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을 때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듯 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니 그는 내게 와 하나의 꽃으로 승화되었듯이.

밀턴을 추모하며 기업의 사회책임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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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learnecon.blogspot.com


2006년 11월 16일은 세계경제사에 기억될 날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이 날 세상을 떠났다. 그는 60~70년대, 신 통화주의(New Monetarism)을 전면에 내걸고 당대의 주류였던 케인즈 학파 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섰다. 마침내 그는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고, 이 후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며 ‘시카고 학파’ 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연구하는 진영에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70년대 뉴욕타임즈에 "기업 의 사회적 책임은 바로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라는 유명 한 칼럼을 기고했다.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선 "기업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 는 주주들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이후 그의 논리는 CSR를 공격하는 학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논거로 자주 차용됐다.

과연 그가 그 유명한 칼럼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또 그것이 약 3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는 어떤 시사점을 던 져 주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칼럼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단 한 가지 만 존재한다. 즉, 그것은 기업이 사기와 부정 행위를 하지 않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 환경, 즉 게임의 룰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 서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들의 자원을 활용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찬찬히 읽어 보니, 그가 기업의 이익 극대화에 있어서 두 가지 전제를 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사기와 부정행위 가 없는'이라는 전제와,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환경'이라는 또 다른 전제이다. 따라서 축자적 해석을 하자면 '변칙과 범법행위 없 이 공정한 완전경쟁 시장 하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곧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첫번째, '사기와 부정행위가 없는'이란 준법과 지배구조 차원의 문제로 해석된다. 그것은 법을 잘 지키 고, 이런 저런 비자금 금고들을 만들지 않는 것을 뜻한다. 또 기업 경영진들이 단 한 명의 지배주주나 그 일가에만 목숨 걸고 투명 하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주들에 대해 그 지분에 상응한 대접을 하고, 대주주의 탈법적 변칙적 부의 세습에 그들의 귀중 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 기업들은 과연 사회에 책임적인가? 몇 퍼센트 안 되는 지분을 보유한(진정한 기업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는) 지배주주에만 책임적인가?

두번째의 조건을 나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싶다. 즉,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환경' 하에서 만들어진 이익이 사회 책임적이라는 밀 턴의 견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과거 40여 년 동안 공정한 시장에서의 공정한 거래라는 자유시장 주의의 원칙이 개발경제의 신속한 효율성과 그로 인해 탄생한 재벌체제의 수직적 집중성에 의해 뒷전으로 내몰렸던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 다.

우리에게는, 기업의 비용을 밖으로 전가시키려는 ‘외부화의 문제’, 가격을 왜곡시키려는 ‘독과점과 담합’, 사회적 최적 해법 (Solution)을 가로막고 시장을 교란시키는 ‘불완전한 정보의 조작과 흐름’, 재벌체제 그들만의 잔치인 ‘내부거래의 문제’ 등 등 허다한 시장실패의 형태들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밀턴의 글을 분해해서 생각해 보니, 그가 말하는 이익이란 화폐단위로 표시된 돈의 총량 그 자체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사회 적 책임이란 단순히 돈만 많이 벌라는 의미가 아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우리 식 속담은 더 더욱 아니다. 그보다 는 돈을 많이 벌되 구겨진 돈을 벌지 말고, 구린 돈도 멀리 하며, 검은 돈은 더더욱 아니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법과 게임 의 룰을 지키고 정직하게 벌어 들이는 이익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뜻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기업들이, 특히 우리 재벌기업들이 밀턴의 말대로만 사회책임을 이행했으면 한다. 비자금 사건이 터져 사회 공헌기금을 구태여 내지 않아도, 분식회계 등 실정법 위반 이후 공익사업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우지 않아도, 사회적 물의를 빚은 후 신 파조의 광고문구를 언론 지면을 통해 남발하지 않더라도 좋다. 그저 묵묵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경쟁하고, 개발하고, 마케팅 하면 된 다. 그것이 곧 밀턴이 말하는 사회적 책임이다.

한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 모교를 방문하여 옛 경제학 스승의 연구실에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제자는 스승의 탁자 위에 놓 인 기말고사 시험지를 발견했다. 시험문제를 읽어보던 제자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교수님, 이건 교수님께서 15년 전에 저희들에 게 주셨던 문제들이랑 똑 같은 문제들인데요! 만일, 학생들이 옛 시험답안을 구해서 암기해 버리면 어떡하죠?” 교수는 껄껄 웃으 며 말했다. “괜찮네, 괜찮아. 문제는 매년 같아도 답은 매년 다르니까”

나는 밀턴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상황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문제는 같아도 해석은 나라마다 다르니까"라고.

'글로컬'과 '로벌'의 작지만 큰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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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phil-osophy2.blogspot.com


꽤 오래 전 런던 시내를 걷다가, 나는 이상한 광고 문구 하나를 접했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글로컬 은행입니다.(We are the best glocal bank)." 세계최대 은행인 HSBC 광고 간판 내용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글로컬(Glocal)'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세계적(Global)'의 'b'가 'c'로 잘못 표기된 것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집에 돌아온 즉시 웹 검색을 해봤다. 그건 그들의 실수가 아니었다. '글로컬'이란 단어는 'Global(세계적)' 과 'Local(지역적)'의 합성어였다.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되, 나라마다 다른 특수성을 고려한다는 일종의 대안적 개념을 담고 있 는 것이었다.

다국적은행인 HSBC는 그러한 신개념을 광고전략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설혹 맞닥뜨릴지 모를 세계화의 부정적 이미지를 비껴가고자 하는 듯 보였다.

지난 10월초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s)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GRI 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속가능 경영과 관련된 보고서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국제기구다. 기업사회책임 보고기준의 이른바 '글로 벌 스탠더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세계 각국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두 가지 다른 생각이 교차됐다. 하나는 기업의 사 회적 책임에 관한 담론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희열을 느끼게 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담론의 전개가 상당부분 서구적 관점과 기준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즉, '글로벌 스탠더드'라 는 기치 하에서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은 내게 묘한 소외감과 경계심 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IMF경제 위기 이후 우리 금융시장의 화두는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은 하나의 기제로 작동하면서 우리 금융시장과 기업경영을 쥐락펴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글로벌 기준을 통해 우리가 경험했던 긍정적인 면마저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 발생했던 손익에 대해 서 냉정하게 따져보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급격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다시피 우리 금융시장의 글로벌화는 밖으로부터 강요된 것이지 안으로부터의 자발적, 자생적 결과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의 벼랑 끝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의 형태로 이식된 것이었다.

따라서 전면적인 자유화와 대외개방으로 대표되는 IMF식 처방이 곧 글로벌 표준이 되어 우리 금융시장을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그것이 한국식 글로벌화의 슬픈 역사다.

이제 사회책임투자로 화제를 돌려보자. 앞서 언급했던 GRI처럼 현재 국제적으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한 보고기준과 그것 을 여하히 평가, 분석해서 전통적인 가치평가모형과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의 EIRIS, 스위스의 SAM, 미국의 KLD와 같은 전통적 사회책임투자 분석기관들은 물론이고 골드만 삭스, 도이치 뱅크 등 과 같은 다국적 투자은행들도 사회책임투자의 분석틀을 개발하고, 그 틀에서 기업을 평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한 글로벌 기관들은 주로 그들의 맥락과 그들의 문화 및 역사 속에서 생겨난 평가모형이나 기준을 사회책임투자의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강변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에서도 밝혔듯이 기업지배구조에 있어서 모든 나라를 아우르는 한 가지 이상적 모델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기업지배구조, 환경, 사회와 같은 비재무적이며 정성적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번 GRI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한 러시아 CSR 컨설턴트의 말이 지금도 내겐 생생하다.
"GRI 가이드라인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러시아적 특성(Peculiarity)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러시아적 특성은 우리 러시아 사람들 스스로 찾아 보완해 나가야지요."

최근 우리나라도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전개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무비판적으로 수 입하는 형태가 되어서도 안되지만, 그것이 사후 약방문식의 대응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보다는 예방적 대응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경영에 있어서 GRI나 여타 글로벌 원칙들을 수용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기업문화, 법체계, 경영 및 투 자 관습 및 환경 등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 먼저 한국적 기업 사회책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 스스로 앞장 서서 우리에 게 맞는 기준을 만드는 것, 즉 지역화해야 한다. '글로벌'보다 '로컬'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그것을 들고 세계화의 무대로 나가야 한다. 우리의 원칙과 평가모형도, 우리의 최선의 실행사례(Best Practice) 들을 직접 우리가 들고 나갈 때, 서구에서 만든 기준이나 규제를 피동적으로 따르는 것(Compliance)에 머무는 것이 아니 라 우리 스스로 선제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 자신의 무대(local)의 토대 위에서 세계(global)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글로벌화 후 로컬화하는 '글로컬'이 아니라 로컬화 후 글로벌화하는 '로벌(Lobal)'이 먼저다.

장하성펀드, 고래사냥일까 팬더보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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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www.radiokorea.com


일본의 포경산업은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다. 작살과 그물 등으로 중무장한 이들 포경선들은 바다 어디에서나 고래가 눈에 띄면 작살 을 날리거나 그물을 쳐서 고래를 잡는다. 대개의 경우, 작살을 맞은 고래는 피를 많이 흘려 죽게 되고, 그물에 걸린 고래는 숨 을 쉬지 못해 결국 죽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포획된 고래는 해체장으로 운반되어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분해된다. 이렇게 분해된 고래의 부위는 각각의 용도에 따라 밀 거래 된다. 이런 고래의 가치는 그 덩치만큼이나 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귀신 고래는 약 3천 만원, 밍크고래는 약 1억 원 이 상 호가한다고 하니 말이다.

기업에도 고래사냥과 흡사한 사냥꾼들이 있다. 지난 1980년대 영국의 핸슨신탁(Hanson Trust)은 기업들에게 가히 공포 의 대상이었다. 요크셔 출신의 제임스 핸슨(J. Hanson)과 고든 화이트(G. White)가 세운 이 회사는 기업사냥의 대표적 인 펀드로 당대를 풍미한 바 있다.

핸슨신탁은 사업전망이 불투명하나, 현금, 부동산 등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벽돌회사나 담배회사 등을 주로 타깃으로 삼았다. 그들 은 공격 대상이 결정되면 즉각 주식 매집에 들어간다. 인수가 완료되면 피인수 회사의 본사 건물, 토지, 공장과 같은 고정자산 등 을 분해하여 팔아 치운다. 그리곤 그 매각 대금으로 부채를 갚은 다음, 회사의 가지치기 작업에 돌입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회사 의 모양새가 갖춰지게 되어 시장가치가 치솟으면 곧바로 회사를 되팔거나 청산 절차를 통해 투자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실현한다.

이러한 형태의 매매기법을 일컬어 투기적 적대인수(Speculative Hostile Takeover)라고 한다. 이들은 기업을 법 인(法人)이 아닌 물적 집적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는 기업을 접수한 후, 가치제고를 통해 재 매각하여 투자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것뿐이다. 이들의 투자기간도 역시 단기적이다.

물론 이러한 기업사냥에 대한 옹호론도 만만찮다. 옹호론자들은 기업사냥을 일컬어 기업 경영에 대한 외부감시기능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 장한다. 즉, 대리인문제(Agency Problem)와 도덕적 해이, 그리고 참호구축(Entrenchment)이라는 주식회사 제도 의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까지 말한다.

화제를 바꿔 한 동물보호기구 이야기를 해보자. WWF(World Wildlife Fund)는 지난 1961년 스위스에 본부를 두 고 창설된 동물보호단체다. 이 기구의 로고는 바로 멸종위기에 처한 팬더곰의 그림이다. WWF는 지난 1980년부터 중국의 샨시 (Shaanxi) 주정부와 손 잡고 밀렵꾼들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한 팬더곰 구하기에 나서왔다. 이들은 주로 팬더곰의 주 서식지 를 중심으로 10,400평방 킬로미터에 걸쳐 약 50여 곳의 보호지역을 지정했다.

그리고 이 보호지역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서 팬더곰을 관리하고 있다. 때때로 이들은 보호지역을 벗어나는 팬더곰을 안전하게 포획해 서 다시 그 지역으로 갖다 놓기도 한다. 그 지역을 이탈하면 쉽게 밀렵꾼들의 사냥감이 될 위험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의 포획은 적대적 포획이 아니라, 매우 친절하면서도 우호적인 포획인 것이다.

자본시장에도 팬더곰 보호캠페인이 존재한다. 바로 사회책임투자의 관여전략(Engagement)이 그것이다. 주식보관자 (Shareholder)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식의 주인(Shareowner)이 되기를 원하는 사회책임투자자들은 때때로 기업 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간섭을 하기도 한다.

그와 유사한 사례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했다. '장하성펀드'와 '태광산업'간의 불꽃 튀는 공방이 바로 그것이다. 태광산업 지 분 5.15%를 취득한 이 펀드가 70%의 절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를 상대로 관여전략의 시동을 건 것이다. 문제점을 적시하 여,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펀드의 투자기법은 한 투자펀드의 볼멘 소리쯤으로 치부될 지 모르지만 그 행간을 들여 다 보면 음미할 만한 대목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수 십 년 동안 외부주주권은 상당부분 무시당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수의 지배주주가 이사회를 장악하 고 주주총회는 들러리를 서온 마당에 기업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말은 사실상 호사가들의 담론쯤으로 치부되었다. 투자한 기업 의 주주이익, 사회에 대한 책임의 이행여부 등의 문제는 고사하고 1인 대주주를 위한 편법과 반칙을 써도 주주들은 먼산만 바라보 고 신세 한탄만 할 뿐 딱히 선택할 수단이 없었다.

이러한 수동적 주주의 문제를 직시하고 생겨난 투자방법이 바로 사회책임투자다. 그러나 사회책임투자의 관여전략은 기업사냥에 있지 않 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5% 내외의 지분 취득에 머물게 된다. 지분 취득 후 그것에 부수되는 주주권을 하나의 자산으로 간 주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기업과 주주와의 상생의 터전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현실화될지 모르는 위험을 판별하 여 소 잃기 전에 외양간부터 미리 고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장하성펀드'는 분명 새로운 지평을 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식도락가만의 식탁을 위해 마구잡이로 행해지는 고래사냥 의 유형에 머물지, 아니면 팬더 곰 보호 캠페인처럼 귀엽고 사랑스런 동물을 우리의 후세에게까지 넘겨주는 친절한 보호캠페인 이 될 수 있을지는 시간을 두고 좀더 지켜 봐야 할 것이다.

마이다스의 '때 묻은' 손을 닦아주는 방법

몇 달 전 ‘바다이야기’ 사건이 세간을 들썩였다. 온갖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러 의혹들의 진위여부를 떠나, 일견 그들 의 장사수완은 대단한 것처럼도 보인다. 바다이야기라는 사행성 오락기의 유통업체인 ‘지코프라임’은 설립된 지 2년도 채 못 돼 돈방 석에 올랐으니 말이다. 자본금 7000만 원짜리 회사가 매출액 1200억 원, 순이익 161억 원의 천문학적 이익을 냈으니 이 쯤 되고 보면 그들은 탁월한 ‘마이다스의 손’의 소유자들이었다.

더군다나 이 회사는 우전시스텍과의 주식교환을 통해 코스닥 진입에 성공했다. 만일 이 사건이 불거지지 않았더라면 ‘지코프라임’의 대 주주들은 이러한 우회 상장을 통해 약 2000억 원에 달하는 주식거부(巨富)의 반열에 등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바다 이야기의 신화는 성립하지도 유효하지도 않다. 그들의 오락기는 시중에서 종적을 감췄으며, 그들은 이제 영어의 몸으로 전락되고 말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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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www.zcars.com.au


화제를 바꿔보자.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그 불똥은 ‘글로비스’라는 회사로 튀었다. 글로비스는 5년 전에 현대차 총 수 부자가 각각 40, 60%의 지분을 출자해서 인수한 회사다. 물류회사인 글로비스는 현대차 등의 계열사매출이 총 매출 의 약 80% 이상을 기록하면서 불과 5년 여 만에 순자산 약 3700억 원의 회사로, 한 때 시장가치 3조2000억 원의 회사 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들 부자에게 돌아간 평가차익만 해도 약 2조원에 근접한다. 불과 5년 만에 50억 원의 투자원금이 400배 가량 뻥튀기되는 순간이다. 이 역시도 또 다른 ‘마이다스의 손’의 사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자금 사건을 거치면서 총수 부자가 글로비스 보유지분의 전량을 사회에 기부하기로 선언함에 따라, 이제 그 화려한 신화는 종 식되었다. 현대차 그룹과의 연결고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마당에서 글로비스의 순항과 영화를 논하기엔 부적절하다는 판단일 터이 다. 따라서 이 회사의 주가는 대폭락했다. 9만원에서 3만원으로 추락하면서 약 2조원의 시가총액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투자자 의 꿈도 희망도 공중 분해되는 순간이었다.

기업경영과 투자를 일컬어 “위험을 관리하고, 기회를 창출하며 수익을 극대화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사회책임투자에 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즉, 사회책임투자는 ‘사회에 대한 책임’ 이전에 투자고, 투자는 무엇보다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 며, 기회를 창출함으로써 최적의 수익률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투자에 비해 사회책임투자가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일반 투자와 사회책임투자 사이에 가 장 큰 차별성으로는, 투자회사를 선정하는 기준과 방법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즉, 장기투자자임을 자처하는 사회책임투자자들에게 있어 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바로 투자위험의 원천이 날로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이었고, 그러한 복잡다기한 위험들이 현재화(顯在化)될 경 우 그들의 재무적 성과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재무적 위험과 기회에만 주로 천착하는 전통적 기법에 더하여, 새로운 분석틀을 발전시켜왔다. 이름 하 여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분석이 그것이다. ESG분석이란, 환경, 사회, 지배구 조 측면에서의 체계적인 잣대를 통해 투자 대상기업을 분석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석 결과물을 놓고 투자의 위험요소와 기회요인 을 판별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사회책임투자자가 사건 발생 이전에 ‘바다이야기’란 코스닥 등록기업과 대기업 관계사 ‘글로비스’를 투자 대상으로 놓고 분석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바다이야기’의 분석가는 사회적 측면에서의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른바, 사행산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불법 여부, 정경유 착 고리 등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사행산업은 산업 자체가 갖는 한계성과 반사회성, 그로 인한 기업의 명성, 도덕성 등과 같은 다 소 주관적이고 애매하나 언젠가는 그 기업에 부메랑으로 돌아와 치명적 흠집을 낼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회책임 투자자는 기업이 장기적 관점에서도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지 여부를 놓고 보고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글로비스’ 투자 여부를 검토하는 사회책임투자자는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를 놓고 고심했을 것이다. 재벌 체제에 대한 가치판단은 차치하 고라도 현대차 그룹의 2세 승계 구도 속에서 ‘글로비스’의 초고속성장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호한 구석이 눈에 띠기 때문이다.

작년의 경우 ‘글로비스’는 현대차로부터만 전체 매출액의 80%를 달성했고, 매출액영업이익률에 있어서도 여타 그룹계열의 물류업체들 (범한종합물류, 삼성전자로지텍)의 1.5~0.8%에 비해 5.4%의 경이로운 실적을 이룩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현대 차가 총수 부자의 지분율이 가장 안정적인 회사에 매출을 몰아주고, 높은 마진을 보장해 줌으로써 이른바, ‘부의 이전 ’(Wealth Transfer)을 도와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따라서 사회책임투자의 분석가는 이 부분에 대한 의문 부호를 달고 이를 재무적 지속 가능성의 위험도와 연관 지어 투자의 실행여부를 판단했을 것이다.

사회책임투자는 ‘마이다스의 손’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마이다스의 손들’이 생겨나고 자라나기 를 염원하며 환영한다. 다만, 그 손이 편법과 반칙으로 얼룩져 있다면, 만일 그 손이 흉기를 들고 우리사회를 위협한다면, 이를 이 슈화하여 사회를 향해 경고음을 울려주거나 그러한 손들에게 다가가 얼룩진 손을 씻어 주고, 흉기를 내려놓으라고 넌지시 손 잡아주 는 몸짓이다. 그리고 그러한 손들이 그들의 탁월한 재능을 살려 그들과 사회와 투자자를 위해 제대로 쓰임받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투자, 하룻밤 데이트 아닌 평생 사랑으로

사회책임투자를 간단히 정의 내리기는 참으로 힘들다. 거기엔 다양한 접근방법들이 존재한다. 종교단체들은 그들의 신념대로, 사회운동가 들은 그들의 원칙 위에서, 환경론자들은 그들의 가치측면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사회책임투자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제일 먼저 ‘길게 보고 투자하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즉, 장기적 안목을 갖고 장기 투자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들리는 말을 실천해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왜 그럴까? 나는 이 문제를 육상경기에 빗대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육상경기의 꽃은 단연 마라톤과 100미터 달리기다.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육상경기는 참 싱거울 것이다. 100미터 달리기 가 긴박한 재미와 역동적인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면, 마라톤은 은근한 재미와 감칠맛 나는 수읽기의 또 다른 묘미를 제공한다.

양자는 또한 달리는 방법도 확연히 다르다. 100미터 선수들은 눈 앞에 보이는 결승점을 향해 숨도 멈춘 채 질풍노도와 같이 내달린 다면, 마라톤 선수들은 가도가도 보이지 않는 목표점을 향해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성큼성큼 달려 나간다.

관전법도 많이 다르다. 100미터의 관중들은 한시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 자칫 한눈 팔게 되면 경기는 보지도 못하고 그냥 끝나 버린다.

그에 비해 마라톤의 관전자들은 우선 느긋해야 한다. 그러면서 천천히 선수들의 전략과 얼굴표정, 주행자세, 구간 당 그들의 기록과 코스의 난이도 등등 수 없이 많은 변수들을 고려하며 꾸준히 지켜본다.

흔히들 기업 경영을 일컬어 마라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분기나 한 회계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꾸준 히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은 전체 구간의 기록을 의식하며 전략을 짜고 완급을 조절해 나가야 한다.

기업 경영이 마라톤이라면, 자본시장은 기업이라는 선수를 지원, 육성하는 스폰서쯤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 스폰서가 마라 톤 선수들에게 단거리 선수처럼 연습하고, 시합에서 42Km의 매 1Km마다 전력 질주할 것을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를 달성하지 못하 는 선수들을 지원 대상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아마도 마라톤 선수들은 단기 실적을 의식한 나머지 몇 개 구간은 좋은 실적을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구간을 놓고 보 면 오버페이스로 인해 중도 탈락하거나, 수준 이하의 성적을 낼 가능성이 아주 높을 것이다. 따라서 그 스폰서도 함께 실패할 가능성 이 높을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시장은 마라톤 선수들에게 단거리 선수들의 연습법과 주행 방법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커다란 오류에 빠져 있다. 즉, 자 본시장의 투자자들은 기업들에게 분기실적에 올인 할 것을 요구한다. 기업 경영자들은 자본의 공급자인 시장의 요구를 무시하기 힘들 다.

따라서 기업경영 역시 100미터 달리기처럼 되어버렸다. 스톡옵션이라는 인센티브는 기업 경영자들을 단거리 선수의 근육질 몸매로 만들 어 버린다. 그들은 단기주가에 우호적인 정책과 방법들을 다 모아서 주가를 들어 올리기 위해 안간 힘을 쓰기도 한다.

또 자본시장을 둘러싼 환경은 어떠한가? 증권회사들은 끊임없이 사고 팔 거리들을 쏟아 놓는다. 인터넷의 발달은 어디서건 실시간으 로 정보를 얻게 하고 즉각적으로 매매에 돌입할 수 있게 한다. 언론은 항상 호재, 악재를 뿌리며 투자자들을 조급하고 성마르게 만든 다.

자본시장의 단기화는 많은 문제점을 일으킨다. 스폰서의 눈치를 보는 기업들은 눈 앞의 이익을 주로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 게 혁신작업과 R&D는 비용으로만 인식되며, 종업원에 대한 투자와 고객들로부터의 명성, 브랜드 등과 같은 무형자산 투자에 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된다. 그 대신 당장 순이익과 연결될 수 있는 투자에만 골몰하게 된다.

단기 실적에 연연하는 기업들은 비용의 외부전가에 대한 유인을 갖는다. 매출액, 영업이익률, 주당 순이익(EPS) 등의 목표에 지나 치게 집착하면, 분식회계, 하청업체 가격인하 압력, 폐수 방류, 대기오염 등등 유혹에 늘 노출될 수 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반 칙, 변칙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돈 벌이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설사 이러한 기업들이 비용의 외부 전가를 통해 반짝 성장했다 하더라도 그 기업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격이나 마찬가지다. 잘 못 터지면 회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무형자산 투자에 소홀한 회사, 종업원과 고객이 불만족한 회사가 지식 정보화 시대에서 지속 가능하게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연목구어를 외치는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사회책임투자는 기업들로하여금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투자방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100미터가 아닌, 42 킬로미터의 마라톤을 뛰는 선수들에게 마라톤을 제대로 뛸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기업들이 중요한 자 산에 적절히 자본을 배분하고, 잠재적 위험을 고려하며 지속 가능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협조, 지원하고 투자하며 함께 이익 을 취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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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beginnersinvest.about.com


장기투자의 교본이 되어버린 워런 버핏(Warren Buffet)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단기투자를 투자라고 말하는 것은 흡 사 원나잇 스탠드(하룻밤의 정사)를 일컬어 로맨스(아름다운 사랑)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이다.

사회책임투자는 하룻밤의 정사에 취해 있는 자본시장을 향해 투자의 본령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목소리다. 잠시 잠깐의 내 돈만 챙기 고 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고, 길게 보며 사회와 기업과 나의 돈이 함께 같은 길을 가자고 던지는 탄원이다.

'분노의 포도' 갈등해소 위한 사회책임투자


존 스타인벡은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서 소작농과 자본주와의 팽팽한 대립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해 농장에 위치한 집을 철거 당할 위기에 처한 소작농과 그 집을 철거하러 트랙터를 몰고 온 기사의 긴박한 대화는 우리에게 참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소작농은 기사를 향하여 으름장을 논다. 만일 내 집 가까이 다가오면 총을 쏴 죽여 버릴 것이라고.

동시에 농부는 절규한다. "나는 앉아서 당하기 보단 나를 굶주리게 하는 사람을 먼저 죽여 버릴 거야."

그러자 트랙터 기사는 말하기를. "너를 궁지에 몰아 놓고 있는 것은 결코 사람이 아니야. 그것은 다름아닌 자본이라는 괴물이야."

이 짧은 대화는 돈의 문제로 인한 인간소외와 계급갈등의 일면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부채를 못 갚아 생존의 터전마저 위협 당하 고 있는 소작농과 단지 자본주의 명령에 충실한 트랙터 기사의 대화 속에서 목격되는 사실은 오로지 자본의 회수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 과 대립뿐이다.

채권회수를 위해 생존의 터전마저 서슴없이 강탈하려는 채권자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소작농의 완강한 태 도, 그러나 상대는 초월적 존재이기에 그 어떤 물리력으로도 결코 타도될 수 없다며 굴종을 요구하는 트랙터 기사의 으름장을 지켜 보 며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과연 자본과 노동과의 선한 연대는 불가능한 것인가? 자본은 무소불위의 괴물이며 착취자인가? 따라서, 노동은 끊임없는 투쟁의 탑을 쌓아 올려야만 하는가?

어찌 보면 산업혁명 이후 인류역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과 다름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을 사악한 것으 로 규정하여 노동의 입장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면,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의 자정(自淨)능력에 믿음을 부여하고 자유경쟁의 시장 경 제 체제를 발전시키며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자의 접점 내지 연결고리를 찾을 수는 없는가? 나는 이 해묵은 물음에 대한 일정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바 로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사회책임투자 (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의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책임투자란 돈 있는 주체들, 즉 자본가의 투자법을 말한다. 즉, 그들의 돈을 투자함에 있어서 단순히 재무적 이윤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기업 지배구조의 측면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사회적'이며 '환경 적대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나쁜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식으로든 자본가들로부터의 견제와 균형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 7월 3일 영국은 사회책임투자법을 제정함으로써 이 분야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사회책임투자를 원하는 사회의 점증하는 요구에 대한 불가피한 응답이었다.

이 법안은 사회책임투자와 관련한 아주 정교한 투자원칙을 규정함으로써 런던금융시장의 투자자들을 긴장시킨다. 이 때부터 사회책임투자는 고루한 종교단체의 주장에서 일약 메인스트림의 투자원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영국에서 이러한 투자가 정착되기까지는 연금 펀드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즉, 현재 영국 주식시장에 있어서 최대 자본가는 시 가총액의 약 40%을 보유하고 있는 연금 펀드들이다. 그리고 이 연금펀드의 자금은 근로자들의 봉급에서 나온다.

따라서 연금펀드의 실질적 소유주는 아이러니 하게도 전통적 의미의 자본가들이 아닌 바로 근로자들 자신들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 국 증권시장의 최대 자본가가 근로자들이며 근로자들은 곧 최대 자본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렇듯 연금 펀드를 매개로 자본과 노동이 상호 의존적인 접점을 마련하고 있다. 펀드의 투자 수익률이 노후 생활의 보장과 맞물려 있 는 상황이기에 근로자들은 연금펀드의 투자정책 입안시의 참여를 통하여 기업들에 대해 역설적으로 고배당을 요구하며 임금 인상의 억제 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한다. 즉, 근로자가 전통적 자본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입장의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다.

또한, 전통적 자본가들은 사회책임투자의 정신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화두를 붙잡게 된다. 즉, 주주이익 중심의 재무적 목표 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ESG측면, 이른바 환경적, 사회적, 기업 지배구조 측면도 함께 고려한다. 또한 여타 이해관계자들 이익 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며 이러한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성장하며 지속 가능하게 발전한다는 실증적 데이터와도 만나게 된다.

나는 우리 사회의 극단적 대치상황에 주목한다. 노동과 자본의 해묵은 논쟁에서 한 치의 진전도 이뤄내지 못하는 경직성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이제 양 극단적 사고는 사회책임투자의 정신 속에서 만나야 한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의 입장에서, 또한 여타 이해 관계자들 의 입장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미덕과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그들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 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 노동은 내 돈의 소중함을 통해 자본가들의 입장을 이해하며 상생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 이러할 때, 자본은 괴물의 탈을 벗고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