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출처 : phil-osophy2.blogspot.com
꽤 오래 전 런던 시내를 걷다가, 나는 이상한 광고 문구 하나를 접했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글로컬 은행입니다.(We are the best glocal bank)." 세계최대 은행인 HSBC 광고 간판 내용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글로컬(Glocal)'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세계적(Global)'의 'b'가 'c'로 잘못 표기된 것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집에 돌아온 즉시 웹 검색을 해봤다. 그건 그들의 실수가 아니었다. '글로컬'이란 단어는 'Global(세계적)' 과 'Local(지역적)'의 합성어였다.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되, 나라마다 다른 특수성을 고려한다는 일종의 대안적 개념을 담고 있 는 것이었다.
다국적은행인 HSBC는 그러한 신개념을 광고전략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설혹 맞닥뜨릴지 모를 세계화의 부정적 이미지를 비껴가고자 하는 듯 보였다.
지난 10월초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s)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GRI 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속가능 경영과 관련된 보고서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국제기구다. 기업사회책임 보고기준의 이른바 '글로 벌 스탠더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세계 각국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두 가지 다른 생각이 교차됐다. 하나는 기업의 사 회적 책임에 관한 담론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희열을 느끼게 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담론의 전개가 상당부분 서구적 관점과 기준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즉, '글로벌 스탠더드'라 는 기치 하에서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은 내게 묘한 소외감과 경계심 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IMF경제 위기 이후 우리 금융시장의 화두는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은 하나의 기제로 작동하면서 우리 금융시장과 기업경영을 쥐락펴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글로벌 기준을 통해 우리가 경험했던 긍정적인 면마저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 발생했던 손익에 대해 서 냉정하게 따져보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급격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다시피 우리 금융시장의 글로벌화는 밖으로부터 강요된 것이지 안으로부터의 자발적, 자생적 결과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의 벼랑 끝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의 형태로 이식된 것이었다.
따라서 전면적인 자유화와 대외개방으로 대표되는 IMF식 처방이 곧 글로벌 표준이 되어 우리 금융시장을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그것이 한국식 글로벌화의 슬픈 역사다.
이제 사회책임투자로 화제를 돌려보자. 앞서 언급했던 GRI처럼 현재 국제적으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한 보고기준과 그것 을 여하히 평가, 분석해서 전통적인 가치평가모형과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의 EIRIS, 스위스의 SAM, 미국의 KLD와 같은 전통적 사회책임투자 분석기관들은 물론이고 골드만 삭스, 도이치 뱅크 등 과 같은 다국적 투자은행들도 사회책임투자의 분석틀을 개발하고, 그 틀에서 기업을 평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한 글로벌 기관들은 주로 그들의 맥락과 그들의 문화 및 역사 속에서 생겨난 평가모형이나 기준을 사회책임투자의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강변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에서도 밝혔듯이 기업지배구조에 있어서 모든 나라를 아우르는 한 가지 이상적 모델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기업지배구조, 환경, 사회와 같은 비재무적이며 정성적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번 GRI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한 러시아 CSR 컨설턴트의 말이 지금도 내겐 생생하다.
"GRI 가이드라인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러시아적 특성(Peculiarity)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러시아적 특성은 우리 러시아 사람들 스스로 찾아 보완해 나가야지요."
최근 우리나라도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전개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무비판적으로 수 입하는 형태가 되어서도 안되지만, 그것이 사후 약방문식의 대응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보다는 예방적 대응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경영에 있어서 GRI나 여타 글로벌 원칙들을 수용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기업문화, 법체계, 경영 및 투 자 관습 및 환경 등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 먼저 한국적 기업 사회책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 스스로 앞장 서서 우리에 게 맞는 기준을 만드는 것, 즉 지역화해야 한다. '글로벌'보다 '로컬'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그것을 들고 세계화의 무대로 나가야 한다. 우리의 원칙과 평가모형도, 우리의 최선의 실행사례(Best Practice) 들을 직접 우리가 들고 나갈 때, 서구에서 만든 기준이나 규제를 피동적으로 따르는 것(Compliance)에 머무는 것이 아니 라 우리 스스로 선제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 자신의 무대(local)의 토대 위에서 세계(global)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글로벌화 후 로컬화하는 '글로컬'이 아니라 로컬화 후 글로벌화하는 '로벌(Lobal)'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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